조선시대 측우기 등장과 강우량 관측망에 대한 역사적 고찰
Abstract
Korea is one of the country with the world’s oldest meteorological observation records. Starting with first meteorological record of fog in Goguryeo in the year of 34 BC, Korea had left a great deal of quantitative observation records,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Goryeo to Joseon. During the Joseon Dynasty, with a great attention by kings, efforts were particularly made to measure rainfall in a systematic and scientific manner. In the 23rd year of King Sejong (1441), the world’s first rain gauge called “Chugugi” was invented; in the following year (1442), a nationwide rainfall observation network was established. The King Sejong distributed Chugugi to 350 observation stations throughout the state, even to small towns and villages, for measuring and recording rainfall. The rainfall observation using Chugugi, initiated by King Sejong, had been in place for about 150 years, but halted during national disturbances such as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Since then, the observation had been forgotten for a long time until the rainfall observation by Chugugi was resumed in the 48th year of King Yeongjo (1770). King Yeongjo adopted most of the existing observation system established by King Sejong, including the size of Chugugi and observation rules. He, however, significantly reduced the number of Chugugi observation stations to 14, and commanded the 352 local authorities such as Bu, Gun, Hyeon to conduct “Wootaek”, a method of measuring how far the moisture had absorbed into the soil when it rains. Later on, six more Chugugi stations were established. If the number of stations of Chugugi and Wootaek are combined together, the total number of rainfall observation station in the late period of Joseon Dynasty was 372. The rainfall observation with Chugugi during the Joseon Dynasty is of significance and excellence in three aspects: 1) the standard size of Chugugi was so scientifically designed that it is as great as today’s modern rain gauge; 2) rainfall was precisely measured, even with unit of Bun (2 mm); and 3) the observation network was distributed on a nationwide basis.
Keywords:
Chugugi, Joseon Dynasty, Wootaek, Seungjeongwon-ilgi, Gaksa-deungnok1. 서 론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상 및 기후 관측자료를 보유한 나라 중 하나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가뭄이나 홍수, 이상난동 등 기후현상과 강수, 뇌전, 토우 등 기상현상 외에 별의 이동과 같은 천문현상까지 관측하고 기록에 남겼으며, 특별히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국가로서 강우 관측에 각별히 노력을 기울여 왔다. 농업 중심의 국가에서 농작물의 파종과 수확 시기 등에 대한 정확한 결정은 국가 산업 및 국민생활과 직결될 수밖에 없으므로 농사와 관련되는 비, 눈, 우박, 서리 등 기상현상에 대한 관측에 관심이 컸으며, 특히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데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기상관측 기록은 기원전 34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수록된 안개 기록을 시작으로 많은 기상 및 기후관측 기록들을 삼국사기, 고려사(高麗史),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편찬물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시대 때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거리가 빗물에 잠긴 깊이, 눈이 쌓인 깊이,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 등을 척, 촌의 단위로 측정한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강우 관측 노력이 이어졌으며, 청계천과 한강의 수심 측정 및 젖은 흙의 깊이를 재는 우택(雨澤) 관측방법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거리의 빗물 또는 적설의 깊이를 재는 것이나, 땅의 성질과 건습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우택 관측방법 등은 정확한 우량 관측 값을 제시한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강우량에 대한 정확한 정량적 관측이 이루어 진 것은 조선 초 1441년(세종 23년) 측우기(測雨器)의 등장 이후부터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 93권(1441년)에 문종이 세자시절 땅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재던 방법을 개선하여 측우기라는 과학적 강우량 측정 장비를 개발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의 기상관측 장비의 등장을 뜻한다. 이듬해 1442년(세종 24년)에는 측우기의 규격과 관측방법 등 관측제도를 확립하고 전국적인 관측망을 구축하였다. 서울의 궁궐(경복궁, 창덕궁)과 관상감을 위시해, 전국적으로 8도(道) 감영(監營)과, 부(府), 군(郡), 현(縣) 등 소규모 단위 기관까지 측우기를 보급함으로써 모두 350소에 이르는 우량관측망을 구축하였다. 이는 세계 최초의 매우 조밀하며 정량적인 기상관측망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측우사업은 약 150년간 지속되다가 1592년의 임진왜란 등 국가적 재난을 겪으며 중단되며, 측우사업이 다시 재건된 것은 약 180년 후인 1770년(영조 46년)이다. 영조는 1770년 5월에 호조(戶曹)에 명하여 세종조의 측우기 제도를 본받아 측우사업을 재건하였으며, 서울의 궁궐(창덕궁, 경희궁), 관상감, 8도 감영, 개성, 강화 등 14지점에 측우기를 설치하였다. 그 밖의 부, 군, 현 등 총 352개 지점에서는 우택 관측을 실시하였으며, 쟁기나 호미자락에 의한 ‘리(犁)’, ‘서(鋤)’의 단위로 관측하도록 하였다. 우택관측이 측우기만큼 정확한 우량 관측자료를 생산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전국적으로 352소의 조밀한 관측망을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측우기 관측지점은 경기도 수원, 광주와 경상도 고성(통영) 및 강원도 춘천까지 확대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남도 진주와 함경북도 경성에서도 측우기 관측이 이루어지는 등 조선 말에는 총 20소의 측우기 관측망을 운영하였다. 따라서 조선 말 측우기 및 우택에 의한 우량관측망은 372소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조선시대 측우기 관측 및 분석에 대한 연구로는, 과거 일제 강점시기 조선 관측소장인 와다 유우지(和田雄治, 1917)에 의해 조선시대 측우기 자료에 대한 최초 정리 및 소개가 이루어진 이래, 측우기 강우측정법, 발명 과정, 우량기록 등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며(Jhun, 1963; Kim, 1988; Chun and Jeon, 2005),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자료로서 서울지역에 대한 강우량 변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진 바 있다(Cho and Nha, 1979; Jung and Lim, 1994; Jhun and Moon, 1997; Kim et al., 2010; Wang et al., 2006, 2007). 또한 조선시대 지방에서 중앙에 보고한 문서를 영인 편찬한 각사등록에 의한 측우기 자료 복원 연구가 Boo et al. (2006)과 Han (2010)에 의해 일부 수행된 바 있으며, 현재 한국기상기후아카데미와 한국기상학회에 의해 각사등록에 의한 측우기 자료 복원 연구사업이 보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Korean Academy of Meteorology and Climate, 2010, 2011, 2012, 2013, 2014; Kim et al., 2012; Cho et al., 2013, 2014).
조선시대에는 측우기와 우택방법 및 한강 수심 등의 측정으로 우량 관측을 위해 각별히 노력하였으며 기록도 많이 남겼다. 조선시대의 우량 관측사업은 매우 과학적이고 정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측망을 유지하였으므로, 이 자료들은 각종 기상 및 기후 연구 등에 그대로 활용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비록 임진왜란 이전의 측우기 자료가 대부분 유실되어 아쉬우나, 영조에 의해 측우사업이 재건된 1770년 이후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다. 현재 1770년 6월 이후 서울에서 관측된 자료는 거의 완벽히 남아 있으며,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던 지방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가 각사등록(各司謄錄)이라는 편찬물에 남아 있음이 확인되면서 이에 대한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기상, 천문 등 자연과학이 발전하였고, 기록을 철저히 하였던 시대였으며, 특히 측우기 창시와 전국적 우량 관측망 구축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 연구는 조선시대의 측우기 관측 등 삼국시대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과거 우리나라의 우량 관측사업 추진 과정과 관측망 구축에 관한 사항들을 파악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과학적 업적들을 더욱 발굴해 내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연구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개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자료 및 방법
이 연구에서 제시하는 측우기 등장 이전 기상관측 사례, 측우기 등장 배경과 과정, 조선시대 우량 관측망 분포도 작성에 사용된 제반 기본 자료들은 삼국사기, 문헌비고, 조선왕조실록과 각사등록 등에 근거하며, 삼국시대 관측사례에 대해서는 기상청 발간 한국기상기록집 4권(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2013)도 참고하였다. 특히 측우기 등장과 관련하여 세종실록 92, 93, 96권에 근거하며, 영조 이후 측우사업재건에 관해서는 영조실록 114권과 문헌비고 3권, 승정원일기 등을 참고하였다. 또 조선시대 부, 군, 현 등 측우기 또는 우택 관측지점의 목록과 위치에 관한 자료는 우량 관측소 목록과 위치에 관한 사항은 세종실록 제 148~155권의 8권으로 되어 있는 지리지(地理志)와 조선 말 대한제국시절 관보(官報) 및 각사등록을 참조하였다. 각사등록은 조선시대 지방 기관에서 중앙에 보고한 각종 문서 및 등록류(謄錄類)를 편집 · 정리하고 영인한 편찬물이다. 각사등록은 대부분 1800년대 이후 자료이지만, 특별히 지방에서 관측된 측우기 및 우택 우량 관측자료를 위시해 많은 농사계절 및 기후 관측자료를 포함하고 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 측우기 등장 이전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기상관측 사례와 비나 눈이 내려 도로에 잠기거나 쌓인 깊이를 장(丈), 척(尺), 촌(寸)의 단위로 정량적으로 측정했던 사례들을 정리하고, 조선시대에 들면서 물이 땅에 스며든 입토심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우택관측의 제도화 과정 및 측우기라는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가 발명되는 배경과 과정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세종시대에 측우사업을 시작 할 때와 영조시대 측우사업 재건 이후로 나누어 전국적 우량관측망 구성 및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특히 영조시대 이후 측우기와 우택 관측지점의 실제 위치를 파악하여 조선시대 한반도의 전국적 우량 관측망 분포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한편 날짜는 양력 표기가 우선이나, 필요시에는 음력과 양력을 함께 병기하였다.
3. 측우기 등장 이전 고대 한국에서의 기상 관측 사례
우리나라에서 강우 관측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행해졌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우, 대설, 가뭄 등 정성적인 관측을 하였으나, 점차 장, 척, 촌의 단위로 측정하는 정량적 관측으로 진전하였다. 삼국사기로 본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상관측 사례는 BC 34년의 고구려의 안개이다. 이어서 BC 16년에 천둥, BC 15년에 가뭄, BC 6년에 대설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난다(Table 1).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정량적 단위로 관측한 사례는 AD 77년 고구려에서 관측된 눈 기록으로 고구려 수도에 눈이 3척 내렸다는 기록이다. 삼국사기, 문헌비고,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측우기가 등장하기 이전에 장, 척, 촌의 단위로 관측된 정량적 관측사례를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누어 정리하였다(Table 2, Table 3, Table 4).
삼국시대의 정량적 관측사례는 삼국사기로부터 모두 17건이다. 모두 대설에 관한 관측기록이고 강우는 AD 350년에 기록한 한 건에 불과하다. 삼국시대에는 대체로 눈이 내린 경우는 쌓인 깊이를 자로 재었으나, 비로 오는 경우는 대우나 폭우 또는 대수(홍수) 등 정성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대체로 강수 관측시 주로 장이나 척의 단위를 주로 썼고, 그보다 작은 촌의 단위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부분 신라와 고구려에서 관측된 기록이고 백제는 한 건에 불과한데, AD 482년에 대설로 무려 1장 이상 쌓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관측사례는 문헌비고로부터 11건의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들면서는 눈뿐만 아니라 비로 인해 잠긴 깊이도 정량적으로 관측한 사례가 많이 보이며 장이나 척 외에 촌의 단위도 보인다. 특히 1124년과 1390년에 폭우로 인해 도로가 1장 이상 잠겼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측우기 등장 이전 정량적 관측사례는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15건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면서는 관측 요소도 다양해지고, 상당히 구체적인 기록을 하고 있으며, 정확한 강우 관측을 위해 관측요소 및 방법을 다양화 하고 개선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볼 수 있다. 측우기 등장 이전에 이미 평지에 비나 눈이 쌓인 깊이를 척, 촌의 단위로 정확히 측정하고 있으며, 그밖에 우박, 서리, 가뭄 시 강의 수위, 조수 간만의 차, 해일 등에 대한 관측도 철저히 하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태조실록 14권(1398년)에 보면, 충청도 청주에 한 달 만에 비가 내렸는데, 땅에 스며든 깊이가 수 촌도 미치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빗물이 땅에 스며드는 깊이를 재는 우택 관측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며, 이는 육상에 내린 비의 양뿐만 아니라 비가 땅에 스며든 깊이에까지 관심을 보이고 벼농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정보인 강우의 양을 측정하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이 우택 관측방법은 측우기 등장 이전인 1425년(세종 7년)에 왕의 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시행된다(세종실록 28권, Fig. 1). 이는 지방에서도 젖은 흙의 깊이로 강우량을 추정하는 우택 관측업무의 수행을 제도화 한 것으로 전국적인 관측망을 구축하는 시초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때의 우택 관측은 척, 촌의 단위로 이루어졌으며, 훗날 영조에 의해 재건된 이후는 리(犁), 서(鋤)의 단위로 측정하였다. 이러한 강우에 대한 측정 노력은 측우기라는 세계 최초의 과학적인 강우량 관측 장비를 발명하는 초석이 되었다.
4. 조선시대 측우기의 등장과 우량 관측망
4.1 세종시대의 측우기에 의한 측우사업 시작
삼국시대 이후 오랫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정확히 측정하고자 했던 노력은 조선시대 세종대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된다. 1436년(세종 18년) 서운관지(書雲觀志)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매년 심한 가뭄과 폭우가 거듭되는데 정확한 강우량을 알 수 없다는 보고가 각 지에서 들어와 호조에서는 서운관에 의뢰하여 새로운 방법을 모색 한다. 이때 빗물을 어떤 일정한 그릇에 받아서 그 깊이를 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내는데 그것은 참으로 간단하고도 정확한 결과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 후 세자 문종이 중심이 되어 서운관 관리들과 함께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어 빗물을 재는 실험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1441년(세종 23년) 4월 29일(양 5월 19일) 세종실록 92권에 실려 있다(Fig. 2). 이것이 측우기 발명과 과학적 방법에 의한 우량 관측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약 4개월 정도 지나 측우기 규격과 관측 방법, 한강 수위 관측, 지방에서의 측우기 관측에 대해 정리하여 공표함으로써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시대가 시작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1441년 8월 18일(양 9월 3일) 세종실록 93권에 실려 있다(Fig. 3). 기사를 보면, 이미 우택에 관해서 법적으로 시행되도록 제도화 되어 있으나, 이에 만족할 수 없어 측우기를 만들어 비를 정확히 측정하고자 한다는 내용과, 측우기 규격과 관측 방법, 청계천 마전교 다리 아래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하는 것, 지방에서도 측우기를 제작 관측하도록 하는 지침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측우기는 1441년 9월에 처음 발명되었으나 이듬해 1442년 초여름 시행단계에 들어서면서 보다 완성된 제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1442년(세종 24년) 5월 8일(양 6월 15일)에 마침내 측우기란 이름이 등장하고, 그 구체적 관측방안과 제도가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이 역사적 사실은 세종실록96권(1442)에 기록되고 있다(Fig. 4).
1442년도의 실록의 내용은 1441년에 비해 보다 구체적이다. 우선 측우기라는 분명한 이름이 등장하며, 측우기의 길이와 직경은 당초 길이 2척, 직경 8촌이었으나, 1척 5촌, 7촌으로 조금 작아졌다. 수심을 재는 자는 주척(周尺, 약 20 cm)으로 지정하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일시와 그친 일시까지 기록하도록 하였으며, 강우량 수심을 분(약 2 mm)의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에서의 우량관측도 표준화하였다. 도 단위까지 측우기와 주척을 보내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부, 군, 현 등의 작은 고을까지 측우기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측우제도는 1441년에 시작되었으나, 측우기로 명명하고 각종 관측 방법의 표준화 및 전국적인 관측망 구축을 통해 측우제도가 확립된 것은 1442년 6월(양력)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시대의 측우기 관측망은 서울에서 양궁(경복궁과 창덕궁), 양감(관상감 본감, 분감) 등 4개 지점과 전국적으로 도, 부, 군, 현 346 소 등 모두 350소로 구성되었다. 세종실록 제 148~155권의 지리지(地理志)에 근거하여 조선 초 행정구역을 보면 8도 감영(광주, 충주, 상주, 전주, 해주, 원주, 평양, 함흥) 밑에 한성부, 개성유후사, 경주부, 전주부, 평양부, 함흥부 등 6개 부(府)급 기관이 있고, 그 아래로 대도호부(大都護府) 4소, 목(牧) 17소, 도호부(都護府) 39소, 군(郡) 92소, 현(縣) 180소의 기관이 있다(Table 5). 한성과 개성은 각각 수도(首都)와 구도(舊都)로서 특별대우 받았고, 제주목(濟州牧)은 전라도에 속하였다.
세종시대부터 측우기 자료는 대부분 풍운기 관측야장에 기록된 후 승정원일기에 기록 보존되었으나, 불행히 승정원일기가 임진왜란으로 상당 부분이 유실되고 현재 1623년 이후만 존재하므로 조선 초기의 측우기 자료가 거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측우기 자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중종실록과 선조실록에 있는 4건과 개인일기로부터 발굴한 5건 등 모두 9건에 불과하다(Han, 2010; Lee, 2012) (Table 6). 이 자료들은 대체로 서울에서 관측한 자료이나, 1514년 12월 15일 충재일기와 1576년의 전순필의 일기에 기록된 값은 각각 필자 권벌과 전순필이 영천군수와 강화부사로 재직시 임지에서 관측 기록한 값이다. 또 미암 유희춘의 일기에는 포백척(布帛尺) (약 46 cm)로 재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간혹 우량관측에 포백척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세종조부터 측우기 관측에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주척(약 20 cm)과 차이가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4.2 영조시대의 측우기에 의한 측우사업 재건
1442년 이후 측우제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측우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 시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앞서 충재일기에서 발굴된 영천에서의 측우기 자료와 선조실록에 나타난 측우기 자료로 볼 때 측우사업이 적어도 선조 때까지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종대부터 이어온 측우사업은 왜란과 호란의 두 차례에 걸친 전란을 겪으면서 중단되고 기록도 대부분 유실되고 만다. 이후의 강우량 측정은 주로 청계천이나 한강의 수위 관측에 의존하였다. 1636년 인조 14년 이후 1889년 고종 26년까지 서울의 강우량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기우제등록(祈雨祭謄錄)에서 보면, 1770년(영조 46년) 이전의 강우기록은 모두 수표(水標) 측정기록이다. 또 인조실록 49권을 보면, 1648년(인조 26년) 5월 13일에 대우(大雨)가 있었으나 수표단자(水標單子)가 들어오지 않았음을 추궁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또 영조실록 58권을 보면, 1743년(영조 19년) 5월 18일에 대우(大雨)가 있었고 예조에서 ‘수표보척(水標報尺)을 계시했다’라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결국 왜란과 호란 등 큰 전란으로 인해 측우기가 파손되고 제도가 무너진 가운데 영조에 의해 측우사업이 재건될 때까지 강우량의 관측은 서울의 청계천과, 한강의 수표에 의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침체하였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측우기를 이용한 측우사업은 영조에 의해 다시 재건된다. 영조는 세종실록으로부터 측우기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측우제도의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면서 측우기를 제작, 전국적으로 배포하여 측우기 관측망을 재구축하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이 문헌비고(文獻備考),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우제등록 4책인 전향사기우록(典享司祈雨錄) 등에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Fig. 5). 이와 관련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같은 날짜 영조실록 114권에도 실려 있다(Fig. 6). 영조 때 측우사업을 재개하면서, 측우기의 재료, 규격과 수심 측정 방법 등 측우기 관측과 관련된 규정들을 세종 때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측우기는 청동으로 만들어 지고 그 크기와 규격은 세종 때와 동일하게 주척으로 길이 1척 5촌(30 cm), 직경 7촌(14 cm)이며, 수심도 주척으로 재었다. 다만 세종 때 특별한 규격이 없었던 측우대에 대하여는 삼척부에 있는 경신년에 새로 만들었던 포백척(布帛尺, 약 46 cm)에 의해 규격을 정하고 있다. 측우대는 포백척으로 높이 1척, 넓이 8촌, 구멍의 깊이 1촌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대석(臺石)의 전면과 후면의 중앙에 각각 측우대 라고 새겨놓았고 뒷면 왼쪽에는 건륭경인5월조(乾隆庚寅五月造)라고 새겼다. 포백척은 약 46 cm이므로 측우대의 높이와 폭, 구멍의 직경과 깊이는 각각 46 cm, 37 cm, 16 cm, 깊이 4.6 cm이다. 세종 조에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 제도를 수립할 때 측우기 규격과 수심 측정에 주척을 사용토록 하였으나 일부 포백척도 사용한 사례가 있으며, 특히 강 수위나 측우대 제작시에는 포백척을 사용하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포백척을 사용하였을 때에는 포백척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외에는 대부분 주척을 사용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1442년(세종 24년)에 구축한 측우기 관측망은 350소에 달하였다. 그러나 1770년(영조 48년)에 재건된 측우기 관측지점은 서울의 궁궐(창덕궁, 경희궁)과 관상감(본감, 분감), 8도 감영, 양도(개성, 강화) 등 14개소로 한정하고, 지방의 부, 군, 현에서는 젖은 흙의 깊이를 측정하는 우택관측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측우기 관측망은 많이 축소되었으나, 우택관측소는 운영하였으므로 우량관측망 자체가 축소된 것은 아니다. 한편 조선시대 행정 개편에 따라 세종 때와 영조 때의 도 감영 위치가 바뀐 곳이 있다. 경기도는 광주에서 서울(서대문 밖), 충청도는 충주에서 공주, 경상도는 상주에서 대구로 이전된다. 따라서 세종 때와 영조 때의 측우기 관측지점은 일부 다르다.
영조에 의해 1770년 5월에 14소로 시작한 측우기 관측망은 경기도 수원(1793)과 광주(1795), 삼도 수군 통제영이 있는 경상남도 고성(현재 통영, 1871), 그리고 강원도 춘천(1888)까지 확대된다. 또한 1896년에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조선 8도가 13도로 나뉘면서 충청북도 충주, 경상남도 진주, 전라남도 광주, 평안북도 정주, 함경북도 경성 등 5개 도감영이 새롭게 발족된다. 그러나 측우기 자료는 진주(1897)와 경성(1897) 등 2개 지점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전라남도, 충청북도, 평안북도 등 3개도의 감영에는 측우기가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770년 5월에 14소였던 측우기 관측지점은 6개소가 늘어나면서 조선말에는 측우기 관측지점이 모두 20개소가 된다(Fig. 7). 경기도의 경우 모두 9소로 측우기 관측소가 집중되어 있고, 경상도도 3소가 있어 비교적 많다. 한편 서울의 경우 양궁, 양감 외에 경기도 감영도 있어 측우기 관측소가 5소로 상당히 많은 편이다.
세종 때 측우기 관측지점이었던 부, 군, 현 등 지방 관서에서는 측우기 대신 젖은 땅의 깊이를 쟁기나 호미에 의해 ‘리(犁)’ 또는 ‘서(鋤)’의 단위로 재는 우택 관측지점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측우기에 의한 관측은 아니지만, 우택 우량관측에 의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망은 유지되었으며, 관측지점은 모두 352소로 세종 때에 비해 증가하였다. 조선 8도의 우택관측소 목록과 관측망 분포도를 도별로 보였으며 Fig. 8과 같다. 경상도 지역이 72소로 가장 많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 지역은 45소~58소 정도로 비교적 고른 분포인데,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은 25소로 비교적 적다. 따라서 조선 후기 한반도의 우량 관측망은 측우기 관측소 20소, 우택관측소 352소로 모두 372소에 달한다(Fig. 9). 이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자동기상관측망(AWS, 515소)에 비해도 거의 손색이 없는 매우 조밀한 관측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의 측우기 자료는 대부분 유실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영조가 측우사업을 재건한 1770년 이후의 자료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서울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는 1770년 6월부터 1907년 8월까지 거의 대부분 남아 있다. 한편 8도 감영 등 지방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와 부, 군, 현의 지방관서에서 관측된 우택 자료는 조선시대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한 문서를 영인 편찬한 기록물인 각사등록에 상당 부분 남아 있는데 주로 1800년대 이후의 자료이며, 현재 기상청과 한국기상학회를 중심으로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5. 결 론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기상 관측에 각별한 관심을 쏟아왔으며, 이미 BC 34년에 고구려에서 관측된 안개기록을 위시해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상 관측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하늘에서 내린 비의 양을 정확히 관측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측우기 등장 이전에도 빗물이나 눈이 쌓인 깊이를 장, 척, 촌의 정량적 단위로 측정한 기록도 삼국시대 17건, 고려시대 12건, 조선시대 15건 등 상당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면서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를 재어 우량을 측정하는 우택 관측법이 나타나며, 측우기 등장 직전인 1425년에는 우택 관측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우량 관측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과 끈질긴 노력은 측우기를 발명하는 초석이 되었다.
측우기가 고안되고 시험관측이 이루어진 것은 1441년(세종 23년) 9월이며, 측우기의 규격과 관측 규정이 확립되고 전국적 관측망이 구성된 것은 이듬해인 1442년(세종 24년) 6월이다. 측우기의 규격은 주척으로 길이 1척 5촌, 직경 7촌이며, 측우대의 규격은 정한 바 없다. 측우기 등장 이전까지 우량 관측은 젖은 흙의 깊이나, 강의 수위 측정에 의존하였으며, 1442년에 측우제도가 확립된 이후는 서울과 8도 감영 및 지방의 부, 군, 현 등 모두 350소에서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이 이루어졌다. 세종 조에 시작한 측우사업은 임진왜란 등 국란으로 중단되며, 약 180년 후인 1770년(영조 48년) 5월에 의해 재건된다. 영조는 세종 조의 옛 제도를 따라 측우제도를 재건하였으나, 측우기 관측망은 대폭 축소하였다. 영조는 측우기 관측지점을 서울의 양궁(창덕궁, 경희궁), 관상감, 8도 감영, 개성, 강화 등 등 14소로 제한하였고, 지방의 부, 군, 현 등 기관에서는 젖은 흙의 깊이를 쟁기 또는 호미에 의해 리 또는 서의 단위로 재는 우택 우량 관측을 제도화하였다. 측우기 관측지점은 후에 수원(1793), 광주(1795), 고성(1871), 춘천(1888), 진주(1897), 경성(1897) 등 6개 지점이 추가되어 총 20소로 늘어났다. 우택 관측지점은 총 352소이며, 경기도 46소, 충청도 55소, 경상도 72소, 전라도 58소, 강원도 25소, 황해도 26소, 평안도 45소, 함경도 25소이다. 산악지대가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우 관측소가 적은 편이나, 경상도를 위시한 대부분의 지역이 상당히 조밀한 관측망을 보유하였다. 따라서 측우기 관측소 20소와 우택 관측소 352소를 더하면 조선 후기 우량 관측망은 총 372소에 달하였다.
조선시대 측우기에 의한 우량 관측사업은 첫째, 측우기의 규격이 현대의 우량계에 손색이 없는 매우 과학적이라는 점, 둘째, 분(2 mm) 단위까지의 상당히 정밀한 관측이었다는 점, 셋째 전국적인 관측망을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였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의 측우기 자료는 대부분 유실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영조가 측우사업을 재건한 1770년 이후의 자료는 상당 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서울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는 거의 대부분 승정원일기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지방에서 관측된 측우기 자료는 상당 부분이 조선시대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보고한 문서를 영인 편찬한 기록물인 각사등록에 담겨 있으며, 현재 기상청과 한국기상학회를 중심으로 복원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측우기 창시와 전국적 우량 관측망 구축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과학적 업적이며, 이번 연구를 통해 조선이 기상관측과 기록 관리를 매우 철저히 하였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기후변화 감시 · 예측 및 국가정책지원강화사업 과제 “조선시대 역사 기후자료 복원연구(I)(과제번호 APCC 2013-3130)”의 연구비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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